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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청] 산림 남벌이 물난리 불라왔다
  • 작성일2004-06-23
  • 작성자 /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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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인가가 피해를 보았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1710) 9월5일자 기록에는 이날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음을 전하면서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남벌을 이와 같이 지목하고 있다.
무차별한 산림남벌이 물난리를 불러왔다는 정부의 공식기록을 확인해주는 이와 같은 역사신록이 담긴 책이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에는 이보다 약 50년 앞선 효종 5년(1654) 6월8일자에는 \\"큰비가 내려 궐내로 물이 넘쳤다. 익사자가 생겼고 삼각산 작은 봉우리가 무너져 내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한성은 왕조 개창 이후 수재와 환경오염 등으로 해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개천(開川·청개천)은 골칫거리였다.
이에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년)는 \\\'개천\\\' 문제 해경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재위 36년째인 서기 1760년, 개천을 준설하는 대역사를 벌였던 것. 강바닥 토사를 걷어내고 하천을 정비하는 일을 보통 준설(浚渫)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준천(濬川)\\\'이란 표현을 주로 썼다.
이 공사는 \\\'준천계첩\\\'에 잘 나타나있다.
공사를 위해 준천사(濬川司)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됐으며 공사 최고 책임자는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영조는 홍봉한에게 개천 준설작업에 관한 전반적인 개요를 수록한 보고서를 만들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되어 현재까지 몇몇 기관이나 개인에게 전하고 있는 자료가 \\\'준첩계곡\\\'.
세종대왕기념관 관장이자 한학자인 이해철(李海哲·70)씨가 심혈을 기울여 \\\'청계천을 가꾸다\\\'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펴낸 책은 필자 개인 소장품인「준첩계곡」에 대한 완전한 번역서이자 해설서이면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공사는 이 해 2월 18일에 시작되어 57일만인 4월 15일에 끝났다.
이를 위해 투입된 인력은 총 21만5천380여명. 예산은 \\"전(錢)이 3만5천여 민(緡)이요, 쌀이 2천300여석\\"이었다.
그 자신의 의지로 실행된 대규모 \\\'국책사업\\\'이니 이에 대한 영조의 관심도 지대할 수밖에 없는 법. 3월 10일 광통교 현장으로 행차한데 이어 공사 막바지인 4월 9일에는 비바람을 뚫고서 다시 청계천을 찾아 오수간문에서 현장을 관람했다.
\\\'준첩계곡\\\'에는 청계천 준설 현장을 친히 둘러보는 영조의 행차 장면을 담은 당시 그림까지 몇 장 수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청계천을 가꾸다\\\'는 모든 한문 텍스트는 한글로 옮겼고, 풍부한 주석을 곁들이는 한편, 무엇보다 자료 원본을 실물 크기대로 영인 수록했다.
청계천 복원공사와 맞물려 이 일대 포진한 조선시대 각 문화재 복원 논란이 한창인데 때마침 귀중한 자료가 선보였다. 열화당. B4변형. 특수양장 120쪽. 6만원.

< 한국임업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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