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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산, 그 고요한 고향에서의 삼일
  • 입상자명 : 권태환
  • 입상회차 : 1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산은 마을을 어린 아기처럼 어르듯 껴안고 있었다. 40명 남짓 모여 산다는 충북 괴산 산골의 작은 산촌 마을 금대촌.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일하고, 산에서 먹고 산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산에 올라 약초를 캤고, 어떤 사람은 산 중턱에 뿌려 놓은 씨앗이 잘 자라는지 살폈고,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며 뜯은 고사리며, 나물 따위를 가려 시장에 내다 팔았다. 부지런 떨기만 하면 먹고 살 걱정일랑 없는 곳이 이곳이랬다.
산이 주는 풍요로움, 들이 주는 넉넉함 덕분에 풍족하진 않아도 모자란 적은 없다는 것이다. 해가 지자 마을 앞 큰 길에 거대한 산 그림자가 드리웠다. 옅은 밤이 되자 산새 울음소리가 났다.

꾸억꾸억…….

그 소리에 몇 번이고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아야만 했다. 내게 같이 놀자 반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 왜 왔느냐 캐묻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고향이 이 작은 산촌 마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한번도 고향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아빠, 우리 고향은 어디에요 하고 물으면 이곳에 살고 있으니 여기가 고향이지 무얼 하고 말을 얼버무렸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식탁 앞에서 올 여름엔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서야 아버지가 지난 20년 동안 고향을 찾은 적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을 하셨다. 피곤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아버지의 어깨는 아무리 털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새벽마다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거운 어깨에 짓눌린 사람처럼 웅크리고 신발 끈을 조였다. 쪽잠이 들었던 어머니가 발딱 일어나 배웅을 하며 투덜거린다. 이렇게 일찍 나가야 하는 거냐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살기 위해선 몇 배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고 무심히 대꾸하시곤 일터를 향해 가셨다.
그렇게 한번도 쉬고 싶다, 피곤하다 말씀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휴가를 가고 싶다고 먼저 얘기하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랑 여동생은 미리 짜 두었던 바캉스 계획을 접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물론 처음부터 고분고분 따라 나섰던 건 아니었다. 나랑 여동생은 입이 댓발 나온 채로 친구 누군 해외로 놀러간다는데 우린 이게 뭐냐고도 투덜거렸고, 산은 딱 질색이라고 힘들게 올라가야 하고, 놀 거리도 없어 싫다고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뜻은 완강했다.
산골 마을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폐허가 되다 시피 한 옛집을 향해 걸었다. 먼 친척 되는 어르신이 간간이 돌봐 주고 있다는 그 집에는 변변한 세간도 없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낡고 헐고 외진 시골집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삼일을 버티나. 온갖 걱정으로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버지가 내게 저녁 반찬거리를 구할 겸 산에 오르자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의 눈에선 빛이 났다.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생기였다. 맑아 보였고, 신나 보였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게 더덕이야. 저건 당귀고, 여기 산도라지도 있네.”
“저걸 캐려고요?”
내가 엉거주춤 땅을 파려고 주저앉으니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름 산에선 뭐든 양보해야 해. 지금 욕심이 앞서 이것들을 가져가면 더 풍성한 가을 선물을 못 받거든.”
울퉁불퉁 구부정한 산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신이 어린 시절 독버섯을 잔뜩 캐 왔다가 할머니께 혼이 났던 얘기, 동무랑 놀다가 배가 고프면 뒷산으로 뛰어 올라가서 더덕을 한 움큼 캐다가 베어 먹었다는 얘기, 내 나이 즈음 되었을 무렵 값 비싼 약초를 약초꾼에게 팔아 번 돈으로 도시 구경을 갔었다는 얘기……. 처음 들어 보는 아버지의 추억들이었다.
“아빤 왜 이 마을을 떠나셨어요?”
“일자리를 구하러 갔었지. 할아버지, 할머니, 거기에 여섯 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다 산에서 나는 것만 먹고 살기엔 부족했거든. 산이 먹을 걸 해결해 주니 배는 곪지 않았다 치지만 학교도 가야 하고, 옷도 사 입어야 하고……, 그땐 또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지.”
육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산촌 마을보단 넓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그러면 동생들도 공부시키고, 부모님께 효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을 버리고 도시로 나왔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살다보니 고향 마을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노라 말씀하셨다.
“여기 보이는 이게 뽕나무버섯이라는 거야. 저건 꽃송이 버섯이고. 태풍이 한두 번 왔다 가면 노루궁뎅이 버섯도 나오기 시작할 거야. 전부 약이 되는 것들이라 귀하지. 저기 돌배도 보이네. 우리 어렸을 땐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돌배를 달여 주셨어. 약 같은 건 먹어 본 적도 없었지만 튼튼했지.”
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산이 주는 것들을 적절하게 이용해 먹고 산댔다. 눈에 띄게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모두 제 몫을 하는 것들이라 부족할 것도 없다며 말끝을 흩트리시는 아버지.
산길을 걷는 동안 우리 부자는 처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는 간간히 걸음을 멈춰 참나물 같은 걸 뜯었고, 또 걷다가 발견한 모든 걸 내게 알려주셨다. 한꺼번에 많은 것들을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만약 이 산촌 마을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아버지처럼 척 보기만 해도 달달 정보를 내뱉을 정도로 박사가 됐을까.
아버지는 산길을 걷는 내내 수다쟁이였다. 내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잠깐도 말을 멈출 수 없는 듯 했다. 도시에서 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의 저녁 식탁은 소박했다. 아버지가 딴 참나물과 산나물 몇 가지로 반찬을 만들고, 미리 가져 온 고기 몇 근을 아궁이에 올려놓고 구웠다. 그렇게 먹는 밥상인데도 참말 달고 맛났다.
밥을 먹은 뒤엔 가족 모두 아버지를 따라 계곡으로 갔다. 이곳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놀이터였단다. 툭하면 동네 애들하고 모여서 다이빙을 하고, 가재랑 다슬기를 잡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문득 까까머리 어린 사내아이가 계곡 물로 풍덩 뛰어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어디, 예전하고 물이 똑같은지 볼까나.”
아버지가 바위 위에서 풍덩 계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참방 거대한 물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개구지게 물장구를 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왜 아버지에게도 우리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과묵해서 다가가기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내 또래의 장난끼 넘치는 아이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반짝 빛나는 초승달이 보였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바라보는 하늘은 그 어떤 영화에서 본 풍경보다 아름다웠다. 차가운 계곡에서 렌턴 하나를 밝혀 놓고 나눠먹는 수박 맛은 그 어떤 요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온 가족의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는 그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보석 같았다. 밤이 깊어 가는 동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우리 가족만을 위한 오케스트라였고 간간히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은 우리를 위해 산이 틀어 준 에어컨이었다.
“참말 좋다…….”
아버지의 입에서 낮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리의 삼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인터넷도 안 되고,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고, 세면대 대신 수돗가에서 샤워를 해야 하는 그런 산촌 마을의 시골집이었지만 1분 1초가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연이랑 어울려 살아야 하는 법인데…… 너희들에겐 그런 행복함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다시 도시로 떠나는 길. 아버지는 점점 멀어지는 산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며칠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산이 아버지의 지친 마음을 치유해 준 것 같았다. 마냥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와 나 사이의 간격도 좁혀 준 듯한 느낌이었다.
산은 어머니처럼 사람을 품어 주고, 상처 입은 곳은 어루만져 준다. 말로 하는 치유가 아니라 눈으로 보여 주는 치유. 작은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로 괜찮다, 괜찮다 얘기해 주고 시원한 산바람으로, 계곡으로, 그늘로, 그리고 온갖 향기로운 풀과 약초와 나물들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
산은…… 이래서 찾게 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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