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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그 숲으로 가는 길
  • 입상자명 : 김선
  • 입상회차 : 18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그 숲에 가려면 배롱나무 가로수가 있는 호수를 지나야 한다. 호수의 물은 유난히 맑고 잔잔해서 수면에 반사된 햇살이 비단실처럼 아롱진다. 특히, 선홍색 배롱나무 꽃이 풍성하게 피는 늦여름 오후의 풍경은 아련한 꿈처럼 곱다. 호수의 서쪽 끝에 ‘대평’이라는 이름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의 초입에는 머나먼 옛날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모아둔 ‘청동기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왼쪽으로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1km 정도 지나면, 앞으로는 들판을 안고 뒤로는 호수를 거느린 야트막한 산이 나온다. 산 아래쪽 능소화가 늘어진 낮은 돌담 사이로 아담한 시골집이 보이고, 시골집 뒤편에는 사시사철 청아한 바람이 머무는 푸른 대숲이 산 위로 이어진다.

경상남도 진주시가 고향인 외할아버지는 시내에서 머지않은 산자락 하나를 오래 전에 마련해두셨다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이사를 하셨다. 볕이 좋은 산 위에 외할머니의 산소를 모시고 산 아래에는 직접 황토 집을 지으셨다. 친환경자재와 재활용품을 이용하여 지은 그 집의 현관에는 ‘어서 오세요’라고 적힌 유리문이 달려있다. 상태도 멀쩡하고 적혀있는 글이 좋아 어느 식당에서 버리는 것을 얻어오셨다고 한다.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문도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그 집은 동네의 사랑방이나 마찬가지이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산소 앞에 모양이 예쁜 배롱나무 두 그루를 심으셨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100일 동안이나 끊임없이 꽃이 피고진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생전에 외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꽃나무이다. 처음에는 산 아래에 복숭아밭과 대추밭을 가꾸셨지만 외할아버지의 연세가 깊어지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언제부터인가 산 전체가 모두 대숲이 되어버렸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 숲에서 닭, 개, 토끼, 염소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자랐다. 나와 외사촌들은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대나무 집과 평상에서 놀고, 닭들은 활개 치며 대숲을 쏘다니다 으슥한 구석에 알을 낳고, 개들은 우리의 신발 뒤축을 졸졸 따라다니고, 소란스런 기척에 놀란 토끼는 대숲 어딘가로 줄행랑을 놓고, 괜스레 심술이 난 염소는 대숲 언저리에서 매매 거리는 풍경이 해마다 이어진다.

외할아버지는 산과 텃밭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자식들에게 챙겨주시는 낙으로 여생을 보내신다. 중부 지방에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부터 머위와 달래, 취나물을 보내주신다. 산에서 직접 뜯어 끓는 물에 데치고, 찬 물에 하룻밤을 우려낸 뒤에 물기를 꼭 짜서 택배를 받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게끔 손질하신다. 그 덕분에 내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뭔지도 모르는 씁쓸한 머위 쌈을 나는 좋아한다. 한 잎 한 잎 손바닥에 바르게 펼쳐 완두콩을 넣은 밥에 달래장을 올려 먹는다. 고소한 들기름에 무친 향긋한 취나물에 겨우내 잃었던 입맛이 살아난다. 색깔이 곱고 향이 짙고 모양이 실한 그 먹거리들로 나는 계절을 먼저 알고, 혈관에 흐르는 우리의 맛을 찾아간다.

지리산 끝줄기의 청정지역에서 오는 그 먹거리들은 어느 것 하나도 살뜰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죽순이 으뜸이다. 시골집 대숲에서는 죽순이 참 많이도 난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의 뜻은 봄날 대밭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촉촉하게 봄비가 내린 뒷날이면 밤사이에 자란 죽순의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쌀뜨물에 소금과 마른 고추를 넣어 죽순을 삶고, 찬 물에 24시간 담가두어 아린 맛을 우려낸다. 희고 매끄러운 어린 죽순의 윗부분은 세로로 썰고 밑 부분은 가로로 썬다. 외할아버지는 한 입 크기로 썬 죽순을 한 끼에 먹을 만큼씩 진공 포장하시고, 죽순을 삶기 전에 벗겨낸 겉껍질은 그늘에 건조시켜 차로 마실 수 있도록 망에 넣어서 보내주신다. 죽순껍질 차는 고혈압과 당뇨, 혈관질환에 약효가 있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운동부족인 도시인들에게 참 좋은 약이 된다고 하신다. 엄마는, 그 귀한 먹거리들을 나누어 먹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혼자 먹기는 더욱 아깝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마음이 가는 지인들에게만 아주 조금씩 나누어주신다.

맑은 공기와 적당한 노동, 건강한 먹거리 덕분에 할아버지의 신체나이는 생체나이보다 열 살 이상 젊으시다. 외할머니 산소를 가까이 두고 돌보시는 것과 아직도 당신의 손으로 가용할 수입을 얻으시고, 자식들에게도 보탬이 되시는 것에 대한 보람과 긍지가 상당하시다. 정작 고마운 사람은 당신이신데도 항상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신다. 잘먹어주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시골집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는 말씀을 드리면 당신의 눈가가 촉촉해지신다.

한여름에 배롱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는 외가에 갈 생각에 마음이 부푼다. 외할머니 제사를 맞아 조용하던 시골집이 갑자기 분주해질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따스한 웃음 너머로 가축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우리를 반기고, 소슬한 바람결에 흔들리는 대숲이 우리를 품어주는 그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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