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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망개넝쿨
  • 입상자명 : 박시윤
  • 입상회차 : 12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산을 오른다. 산행에서 누군가를 젖혀 보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욕심이라며, 행여 그런 거라면 애초에 빠지라는 말에 발끈 오기가 치민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나를 중환자 취급하는 가족들의 태도가 사뭇 못마땅해 이를 악물고 따라나섰다. 누가 뭐래도 산행을 하기에 나의 체력은 충분했다. 남정네들은 일찌감치 걸을을 치고 나갔다. 나를 걱정해서인지 큰 아들 놈이 느린 내 보폭을 맞추며 동행한다.
무리였을까. 중턱까지도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식은땀이 나고 산멀미가 치밀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백안이 되어서야 못 이긴 척 바위에 몸을 기댔다. 아들놈이 산행을 멈추고 내려가자 성화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태 전, 암 진단과 더불어 몸의 한 곳을 도려내고 수시로 나타나는 익숙한 증상이다. '이러고 조금만 쉬면 다시 괜찮아질 텐데...' 더는 욕심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어금니 꽉 물고 버틸 때가지 버텨보자고 고집을 피웠지만 몇 발작국도 때어놓지 못하고 또 주저앉고 말았다.
휴직일의 수가 출근한 날보다 많아졌다. 입맛이 떨어지고 쉽게 피로감이 밀려왔다. 입덧처럼 헛구역질이 나고, 잊을 만하면 코피가 터졌다. 무기력함은 강단 넘치던 나를 쉽게 주저앉혔다. 걱정하던 주변의 눈초리가 조금씩 따가워지고 있었다. 평생 뼈를 묻겠따고 다짐했던 직장은, 더는 내 편이 아니었다. 일분일초의 여유도 없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중환자실은 나의 일터였고, 나른한 몸과 더불어 직장에서 나의 몫은 점점 구실을 잃고 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직서에 서명을 했다.
실업자 생활은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내 모습을 보니 자꾸 눈물이 났다. 어는 정도 몸이 회복될 무렵 이력서를 준비했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 한참 커가는 아이가 둘, 그것이 나를 대변하고 있었다. 면접조차 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였다. 눈높이를 낮추어 다시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의 수가 많아질수록 체념과 상처의 수도 늘었다. 그나마 나를 채용하는 곳은 경력과 걸맞지 않게 터무니없는 낮은 급여를 제시하거나 아니면 유독 힘들어 모두가 꺼려하는 부서였다. 나도 뒷방으로 밀려난 퇴기가 되는 것인가. 이제 이 바닥에서 나는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인가.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여기며 일을 했지만 자존심 보다 체력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해 또 사직서를 썼다. 비참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의지를 품을 때마다 힘없는 다짐은 옹이도 만들지 못했다. 영원히 아물어지지 않을 상처만 지닌 채 또 바닥에 누워 지냈다. 더는 버틸 의지가 없었다.
한참 넋을 놓았을까. 눈을 떴을 때 큰아이가 걱정스러운 듯 흔들어 깨웠다. 양기를 받아 잘 자란 소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빛이 그리웠다. 흐물흐물한 몸으로 빛이 드는 곳을 찾아 다시 몇 걸음을 옮겨 놓다가 그만 무엇엔가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망개넝쿨 이었다. 한줄빛을 구하기 위해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 곳을 향해 본능처럼 기어가고 있는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앙칼지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망개나무였다. 하도 반가워 기어가다시피 다가섰다. 새파랗고 도톰한 열매가 보였다. 몇 개 따 혀나 축일까 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순간 보드랍던 넝쿨손이 잎사귀 아래 숨겨 두었던 가시를 드러내며 팔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긁힌 상처에서 붉은 피가 배어 올랐다. 순한 척, 여린 척 있다가 손을 대니 매섭게 긁어놓는 망개가 꼭 내 앙칼진 성격과 닮아있는 듯 했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까칠한 성격 탓에 늘 외톨이로 지냈던 나였다. 나는 바닥까지 추락하고서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둘러보는 여유를 배웠다. 다시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망개나무를 다독였다. 망개는 내 몸을 적신 식은땀을 보고서야 도톰한 열매 한 움큼을 손에 쥐어 준다. 시큼 떨떠름한 맛은 오래 전 그 맛과 여전했다. 바람이 불자 허공에 떠 있던 여린 넝쿨손이 한들거리며 자신보다 조금 더 높은 나무의 가지에 착-감겨 붙는 것이 아닌가. 대롱대롱 곡예를 타는 가 싶더니 이내 나를 내려다보며 한 줄 미소를 건넨다.
사는 것은 다 이래. 삶이 아무 의미 없이 늘 똑같은 거 같아도, 내가 꿈꾸는 것이 한 없이 높아서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서기 어서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처럼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어. 봐, 내가 만든 성(城), 여름 내내 흔적도 없이 자라서 한 줄 빛을 얻기 위해 오르고 또 오르지. 꿈은 한순간에 다 이루어지는게 아니야. 여린 넝쿨손이 가시손이 될 때까지 기어봤어? 고작 몇 번 밀려났다고 그래? 난 이유없이 꺽이고 밟히고, 평생을 그러고 살아.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기면서, 밟히는 만큼 독하게 일어서! 언젠가는 너도 너만의 성(城)을 이루게 될 테니까. 자 어서가. 기더라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잖아. 그 길이 탐자니 않니?
가난한 집착이다. 보드랍던 넝쿨손이 가시손이 되고 연둣빛 잎사귀가 두툼하게 변해가도 망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거친 산을 기어서기어서 간다. 아무도 엾보지 못할 성(城)하나 지어보는 게 소원이었을까. 빈틈없이 얽히고 설켜 제법 촘촘히도 엮어 놓았구나 싶다. 마디마디 진액을 뽑아 잎사귀를 돋우고, 넝쿨손 한 치씩 키를 더하고 나면 시큰하게, 떨더름하게 몸 구석구석이 저려오곤 했을 게다. 특히 어는 계절에선가 새파랗고 도톰한 열매가 겨드랑이를 고통스럽게 뚫고 나와 자신을 의지한채 자라나고 있음을 알았을때, 삶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며 질곡의 삶을 숙명처럼 이어가야 했으리라.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어디까지 더 기어서 가야 할까. 주저앉고 싶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할때, 누군가의 발목을 낚아채고 넋두리라도 늘어놓고 싶었을 게다.
다시 걸음을 떼어 놓는다. 어렴풋이 길이 보인다. 가난한 집착이 강인하게 일어서 기어갈 힘을 모으고 있다. 손에 흙이 묻고, 옷은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다. 넝쿨손이 가시손이 될 때까지 주저앉지 않으리라. 아무도 엿보지 못할 성(城) 하나 짓게 되는 날 내 앞마당에 망개나무 한 그루 은인처럼 모시고 싶다. 주저앉고 싶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할 때, 누군가의 발목을 낚아채고 넋두리라도 늘어놓고 싶을 때 망개열매 주저리주저리 열리듯 나의 삶도 그렇게 오롯이 열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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