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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소나무 예찬
  • 입상자명 : 김덕종
  • 입상회차 : 10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이번 여름의 더위는 그 기세가 대단했다.
찜통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 계곡 두 군데를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자란 내겐 나이가 들면서 심산유곡이 점점 좋아져 가고, 도시에서 자란 처는 바다를 좋아하면서도 나무 그늘이 있는 조용한 계곡에 가고 싶어 한다.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를 따라 깊고 길게 형성된 계곡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더위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계곡 주차장엔 피서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 가족은 한참을 걸어서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 중학생 막둥이는 바로 물속에 뛰어들더니 물이 너무 차갑다고 소리쳤다.
나는 물보다 계곡 주변에 들어선 울창한 나무들에 눈길이 먼저 갔다. 몇 가지 나무들 중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면서 너무도 정겹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계곡 가에는 폭우 때문에 뿌리를 드러낸 채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폭우가 휩쓸고 가도 물가에 심기운 행복한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을 지닌 동글동글한 돌들 사이로 맑고 깨끗한 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나무 근처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가족들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소나무와 함께 자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향의 산들은 소나무가 많았다.
예닐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지게를 지고 뒷동산 솔밭으로 가서, 바늘 같은 솔잎이 땅에 떨어져 수북하게 깔린 솔가리를 긁어오거나 주먹한 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넣어 오곤 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밥을 짓고 고구마, 옥수수를 삶거나 방을 데우고 쇠죽을 끓이기 위해 언제나 많은 땔나무가 필요했다. 우리 집은 항상 땔나무가 부족하였는데, 나뭇단이 가득 쌓인 집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동네 근처의 산은,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땔감으로 대부분 베어 낸 탓에 멀리서 쳐다봐도 벌거숭이 상태였었다. 부족한 땔감을 보충하기 위해 소나무 가지나 둥치를 베어 장작을 마련키도 하였다.
어린 시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인적이 드문 산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외갓집에 갈 때면, 길가의 축 늘어진 소나무에서 불어오던 솔바람 소리에 겁을 먹고 종종걸음을 쳤다.
굵고 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기둥과 보를 만들고, 조금 가는 것은 서까래로 써서 집을 짓던 모습도 생각났다. 성인이 된 후, 가까운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소나무로 된 관(棺)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소나무의 다양한 용도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집 앞이나 동네 어귀에 새끼줄을 걸어 놓고 생솔가지 등을 꽂아서 낯선 사람을 통제하던 '금줄'이란 것도 있었다. 아기를 낳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성역을 표시한 것이었다.
'솔'이란 순우리말과 송목(松木), 송수(松樹)솔나무, 소오리나무 등으로 불린다는 소나무! 경북예천의 석송령(石松靈)이란 노송(老松)은 사람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세금도 내고 동네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준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 아래서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와 너무나 밀접한 소나무이다.
소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해 질 녘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의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상쾌하고 행복했다. 오는길에 산자락에서 적송 군락을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다.
여느 소나무에선 느끼지 못하는 품격을 지니고 말없이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태가 범상치 않은 고고한 풍모를 지닌 적송 몇 그루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군계일학이란 말이 생각났다.
나는 왜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유독 소나무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일까?
철마다 형형색색의 예쁜꽃을 피우는 수목들도 있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유실수도 많은데....
그 이유는 소나무가 지닌 고결한 기품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엄동설한, 벌거벗은 나목들이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늘 푸르고 청청한 기상으로 떡 버티고 서 있는 소나무! 기개의 상징이며 의절의 대명사로 일컬어 오는 나무! 그 의젓하고 꺽이지 않는 기상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지리산 계곡을 다녀온 후,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의 물길을 바라보며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던 하동 송림의 솔밭이 떠올랐고 다시 한 번 방문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한때 세계를 풍미하던 존 바에즈란 여가수와 노래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은은하면서도 맑고 앳된 목소리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로고"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련한 추억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소나무 껍질을 그대로 벗겨먹고 흉년을 넘겼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김동리의 송찬(頌讚)은 더욱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오오 솔이여, 솔은 진실로 좋은 나무, 백목지장(白木之長)이요 만수지왕(萬樹之王)이라 하리니 이 위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고."
세상이 혼란스럽고 고난과 역경의 파도가 노도와 같이 휩쓸어 올 때에, 결코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갈망하게 되는가 보다.
온간 유혹과 갈들의 현장에서도 꿋꿋한 지사(志士)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고고(孤苦)한 풍모 지닌 소나무!
소나무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강직함도 가르쳐 주고 있으니, 나는 이 나무를 통하여 많은 무형의 재산을 얻고 있는 셈이다.
올여름, 시원한 소나무 그늘 아래서의 지리산 계곡 피서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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