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9 국립수목원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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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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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바람과 햇살이 기분 좋은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세차게 내리던 여름비가 순식간에 꽁무니를 뺐다. 비가 머물다 간 자리에는 한층 높아진 하늘을 가득 메우는 솜사탕같은 새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아직은 뜨거운 햇살의 기운을 씻어주듯 선선하게 온몸을 휘감는 실바람이 솔솔. 아뿔싸. 여름 햇살 한 번 뜨겁게 닿은 적이 없건만 고개 들기 무섭게 가을이 오고 있다. 온종일 어지럽게 귓가를 울리는 풀벌레 울음소리에 시간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보다. 어느새 낮이 짧아졌다. 가을빛이 서서히 물들어 간다.

가을이 오는 하늘
수목원 곳곳에 달콤한 계수나무 향기가 퍼진다. 그것은 잠자리의 날갯짓을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끝을 잡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바람 위에 앉아 점점이 퍼지는 도화지 위 물감처럼 수목원 전체로 퍼져 나간다. 어느 한 지점의 전시원이라 정확히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계수나무는 누구보다 뚜렷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내보인다. 가을이 되면 제일 먼저 물드는 노랗고 동글동글한 잎으로. 잎을 하나 따다 맛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솜사탕같은 향내로. 강하게 달달한 향을 내뿜는 그는 가을이 깊어지면 가을빛 잔뜩 머금던 노란 하트모양의 잎을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단풍나무의 낙엽만큼 요란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더 우아하고 아기자기하게 천천히. 향이 나기 시작하는 8월의 말부터 그 향과 함께 떨어진 잎이 바닥을 가득 덮는 10월의 말까지 계수나무는 그가 뿜어내는 향만큼이나 달콤한 가을을 선사한다. 여름의 끝자락, 계수나무 향나는 가을이 시작되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계수나무
바람이 고인다. 바람이 가을을 붙잡고 느티나무 길에 깃들었다. 초록의 느티나무 나란히 줄지어 선 그곳에는 나뭇가지 위로 드리우는 햇살과 시끄러울 정도로 울리는 매미소리를 제외하고 오직 바람과 가을만이 진하게 고여 있다. 느티나무 길은 여름에는 누구보다 훌륭한 그늘이었다. 햇살도 그는 빗겨가는구나 했다. 유난히 걸음 잦은 비에 가려 제 모습 보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여름 햇살은 비가 잠시 쉬는 날이면 온 힘을 다해 더욱 뜨겁게 머리 위로 내리쬐었더랬다. 그 때에도 느티나무길 아래에 서면 거짓말처럼 한 줌의 바람이 가늘게 불고 있었다. 햇살마저 도리 없이 물러나는 느티나무 길은 계절이 가을을 담을 무렵이면 더욱 선선하게 기분 좋게 바람을 모으는 듯 하다. 울긋불긋 단풍들어 1년 중 절정에 이르는 10월이 오기 전까지 나른해지는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즐거운 가을바람이 고인다. 어느새 훌쩍 지나가는 시간이 고인다. 아! 가을이 고였다.
느티나무길
물봉선 꽃이 피면 가을이라 하는 이도 있다. 가을이 되면 산과 들의 습지에서 아름답고 가녀린 자주색 꽃을 피우는 물봉선이 8월이 마저 지나가기 전에 부랴부랴 꽃을 보여준다. 햇살이 드리우면 반가운 안녕하듯 수줍게 반짝이고 바람이 잎을 간질이면 기분 좋은 듯 살며시 몸을 떤다. 물봉선은 가을 내내 가을처럼 웃는다. 가을임을 실감나게 한다는 물봉선은 여름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8월에도 가을을 전해주려 수줍지만 환하게 웃고 있다. 얌전하고 고운 자주색 꽃에 가득 담아낼 물봉선의 가을이 반갑다.
무리지어 핀 물봉선
하늘에 가을이 들면 지나가는 구름마저 가을인 듯 차분하다. 초록의 잎사귀에 가을빛이 물들면 어느새 진한 단풍이 들고, 세상은 온통 울긋불긋 형형색색이 된다. 가을빛은 오묘하고 아득하다. 바람은 여유롭지만 또한 위태롭고, 주위를 감싸는 공기는 겨울과는 다른 모습으로 역시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또한 청명하며 쾌청하다. 처서가 지나고 가을의 길목에 접어든 9월은 다양한 빛깔의 색을 자아낸다. 완연한 가을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도 아닌. 바람이 겨우 자리를 잡고 숲에 깃들기 시작한 9월의 수목원은 변화의 지점 애매한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제 막 바람이 선선해지고 햇살이 따사로워졌으며 잎의 색이 조금 더 짙어지고 계수나무 향이 코끝을 찌르는. 매미가 크게 울고 하늘이 높고 차분하며 낮이 짧아지는 변화의 출발점. 시나브로 가을을 향해 걸어가는 9월에는 가을의 신호를 찾아보자. 그 신호를 온몸으로 느끼며 가을을 맞자. 어느 순간 깊어진 가을의 중심에 당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