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의 초입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이곳 DMZ자생식물원을 둘러싸고 있는 숲과 나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내려놓고 겨울로 성큼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머리에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말이지요. 올해 처음 상주근무를 시작했던 3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식물원 뒷산은 눈을 하얗게 머리에 이고 있었습니다. 일 년 중 절반은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반년설'이라는 애칭을 붙여보기도 하였지요. 식물원은 지금 온통 설국입니다. 아마 우리는 내년 늦은 봄까지 눈 속에 묻혀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12월을 맞이하고 보니 연두와 초록, 그리고 단풍으로 물들었던 한 해가 되살아납니다. 올 한 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DMZ자생식물원 식구들에게는 그야말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습니다. 애잔한 마음에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지난 달력을 자꾸만 들춰보기도 합니다. 하여, 이번에는 DMZ편지를 통해 한 해 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DMZ자생식물원에 와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시작했던 업무는 DMZ 일대 식물의 조사 및 탐색이었습니다. 흰 눈과 함께 시 작했던 우리의 식물 조사는 골짜기의 물소리와 함께, 굽이치는 산등성이와 함께, 때로는 무장한 군인과 함께 부지런히 이어졌지요. 일반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지역을 출입하느라 위험하기도 했으나 희귀·특산식물들을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적지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식물 탐사는 'DMZ일대는 생태계의 보고' 라는 말을 실감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산책 삼아 나섰던 DMZ자 생식물원 인근 숲에서 조우했던 모데미풀, 지뢰 철책이 머지않은 곳에서 빠끔 고개 내밀던 광릉요강꽃, 대암산 용늪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비로용담의 발견, 오송송 한다발 선물처럼 모여 피던 제비동자꽃…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그러나 좀처럼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귀한 친구들이었지요.
한편, 식물을 조사함에 있어서 정확한 동정과 증거 표본 확보를 중요한 사안으로 여기는 우리 연구진들은 DMZ 일대 식 물을 조사하며 본 과정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파종 및 삽목에 의한 식물 증식에 우리의 많은 고민과 열정을 실었습니다. 수집 된 생체를 건강히 보관하여 적절한 환경에 식재하는 것 역시 우리의 소관이었지요. 이렇게 우리의 애정과 땀으로 맺어진 결실은 지난 자체평가와 본 평가에서 많은 분들에게 자세히, 그리고 깊이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원을 앞둔 DMZ자생식물원의 업무가 많다 하여도 우리의 근간은 '연구' 이기에 논문 게재 및 학회 논문발표를 위하여 벽지에서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DMZ산림생물의 보금자리가 되고자 DMZ일대 식물의 탐색·수집 및 보전·복원, 문화·교육, 네트워크 구축 등 개원을 위한 우리의 토론은 지칠 줄 몰랐습니다. 또한 DMZ관련 심포지엄에는 주저 없이 참석하여 의견을 공유하고 보다 나은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정말 숨 가쁘게 달려온 2014년이었네요.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동안 DMZ자생식물원에는 가을이 슬며시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풍경이 눈에 삼삼합니다. 이 풍경 속에 우리가 뛰어든다는 것이 미안할 만큼 절경인 날이 많았지요. 유난히도 짧았던 가을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금세 겨울이 찾아와버렸지만요.
그렇게 다시 겨울, 2014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쉼 없이 지낸 한 해였습니다. 우리의 업무와 연구의 시간만 도려낸다면 적막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만 같은 이곳에서요. 누구는 이곳에서 식물 식재 능력이 일취월장하였다 하고, 어느 누구는 삽질 실력이, 또 다른 누군가는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성장은 식물에 대한 마음가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해 동안 DMZ자생식물원에서 우리가 펼친 숱한 몸짓의 궁극적인 목표는 식물의 탐색·수집·증식·전시·교육·공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식물의 보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식물들 곁에서 식물들의 참 좋은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지요.
모든 자연이 눈에 덮여 침묵하는 시간, 우리는 DMZ 일대 식물들이 땅속에서 뿌리를 꼼지락거리며 혹한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식물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곳 식물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한 해 마무리와 새해를 맞이할 준비로 번잡한 연말을 보내고 계실 테지요. 겨울 숲에는 가보지 못할지라도 각자의 마음 속에 겨울 숲을 하나씩 품을 수 있는 12월이 되기를 빕니다. DMZ자생식물원에는 오늘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