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 국립수목원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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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 따라
'느

림'의 미학.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에 '느림'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탈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의 색다른 매혹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목원이라는 작은 전제가 주어진다면 다르다. 수목원에서의 느림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파릇한 초록 잎사귀가 넘실넘실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수많은 꽃이 주춤주춤 고개를 밀고 세상과 마주하는 수목원의 5월, 5월의 봄길. 느림의 미학이란 대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숨결이 가득 고인 길을 천천히 걷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봄길 따라 느리게 걷기. 수목원 대자연의 숨결을 가득 느끼며 5월의 봄길을 천천히 걸어보자.

정문을 지나 한창 공사 중인 어린이정원 옆에는 작은 샛길이 있다. 이는 정문과 육림호를 연결했던 습지원이 사라지면서 이를 대신하기 위해 생긴 '임시길'이다. 하지만 그 작은 샛길은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자연스레 수목원과 하나가 되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나무의 기운이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신경을 타고 흐를 것만 같은 길. 요즘 수목원을 방문하는 많은 방문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봄길이다. 어린이정원 옆 작은 샛길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그 짧은 길을 천천히 거닐며 감탄의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 길에 들어선 순간 바닥부터 깔린 나무의 잔해가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일까. 웃음의 마법, 즐거움의 마법, 행복의 마법. 어린이정원 옆 작은 샛길에는 바닥에 깔린 피나물 노란 꽃만큼이나 행복이 넘쳐흐른다.
어린이정원 옆 작은 샛길
서양측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초록의 숲 속. 마치 숲 속 깊숙이 우리를 안내하는 듯 '산책로'라는 글귀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린이정원 옆 샛길을 빠져나오면 곧 이 초록의 숲 속과 만날 수 있다. 서양측백나무 사이로 햇빛이 한줄기라도 비집고 들어오면 그만한 멋이 없다. 반짝반짝 빛나는 측백나무 잎들의 움직임에 끌려 절로 발걸음이 닿는 곳. 그 측백나무 잎들이 뿌리는 빛 조각에 정신없이 마음을 빼앗기는 곳. 산책로에서의 느리게 걷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곳만 빠져나가면 어느새 탁 트인 산책로가 보인다. 키 큰 나무들과 머리 위로 줄지어 선 벚나무가 우리를 지켜주는 듯 산책로를 걷는 발걸음에 안정감이 있다. 머뭇거리지 않는, 거침없는 발걸음. 가볍다.
산책로
산책로를 지나 거쳐 벚꽃이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도착한 육림호. 한창 봄이 머무는 육림호에는 벚꽃이 가득 피었다. 호수를 빙 둘러 걷다보면 어느새 봄기운을 듬뿍 받은 나를 느낀다. 육림호를 따라 걷는 소소한 산책은 두발로 종종거리며 걷는 가벼운 산책이 아니다. 온몸으로 하는 산책. 몸 이곳저곳을 돌며 나를 정화시키는 봄 자체를 느낀다면 이 가볍지 않은 산책을 결코 멈추고 싶지 않아질 것이다.
벛꽃이 가득 핀 육림호
육림호를 나와 전시원으로 가는 길, 노랗게 핀 개나리가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진한 노랑의 꽃을 가득 피워 온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는 개나리. 만개한 개나리꽃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휘날린다. 어느새 바람마저 노랗게 물들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고 1년이 12달인 것처럼, 봄이면 개나리 노란 꽃이 활짝 피어 거리를 수놓는 것이 마치 하나의 현상인 듯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웅장하고 독특하지 않은, 튀지 않는 그 자연스러움이 개나리의 멋이리라. 개나리꽃이 머리 위를 온통 메운 길을 천천히 걷는다. 수목원의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젖어있는 개나리에 이끌려 개나리 군락지를 걷는 이들도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 개나리가 뿌리는 노란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연과 호흡한다.
난대온실 뒤 개나리 군락지
아래에서 올려다 본 관목원의 색이 알록달록하다. 하얗고 커다란 꽃을 가득 피운 목련과 노랗게 세상을 수놓은 개나리와 파란 하늘에 점점이 찍힌 분홍 진달래가 있다. 하늘이 비단이라면 그 비단 위를 예쁘게 수놓은 것이 바로 분홍 꽃무늬의 진달래. 진달래가 하늘 높이 솟아 햇빛을 반사하면 분홍의 얇은 꽃잎에 하늘이 반사된다. 그 투명함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렇게 진달래 군락지로 발걸음을 향한다. 진달래가 꽃을 가득 피워 길이 만들어졌다. 굳이 다듬거나 꾸미지 않은 진달래와 진달래 사이의 길. 그 길에 다다른 사람들은 카메라를 결코 놓지 않는다. 화려한 진달래의 분홍빛에 모든 이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진달래는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람이든 바로 밑의 작은 야생화든 파란 하늘이든 상관없이 진달래의 기운을 받은 모든 것이 화사해진다. 짧은 그 길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자꾸 미련이 남는다. 고개를 자꾸 뒤로 돌리며 내려오는 길, 이 미련은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일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관목원 뒤 진달래 군락지
여름이 되기 전 얼마 남지 않은 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5월의 봄. 5월의 봄은 수많은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탄생의 봄이다. 탄생의 봄에는 바람마저 따뜻해 온통 포근한 기운만이 가득하다. 대기를 타고 흐르는 보송보송한 기운이 수많은 꽃을 쓰다듬고, 힘들게 겨울을 난 나무를 토닥인다. 그러면 나무는 초록의 이파리들을 가지마다 퐁퐁 쏟아낸다. 어여쁜 꽃을 수북하게 피워낸다. 그 초록의 이파리와 꽃이 보란 듯이 줄지어 서있고 이를 보는 사람들의 웃음꽃이 새로이 피어난다. 이 모든 것이 수목원의 자연과 천천히 호흡한다. 그곳이 바로 5월의 봄길이다. 온갖 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그 길에 '느림'의 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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